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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김희백 목사 2023-09-10 추천 0 댓글 0 조회 22
[성경본문] 요한복음11:17-37 개역개정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본문 : 1117-27, 32-37

제목 : 예수님의 눈물

 

(서론)

 

히틀러가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한 자 치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하나 그 눈물은 진실한 눈물이 아니고 가식적인 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진실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은혜 받겠습니다. 진실한 눈물을 흘리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흘리는 이유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본론)

예수님의 눈물은

 

1. 신자의 불신앙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17절에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

어떻게 나흘인가? 예수님이 동 베나니에 계셨고 나사로가 서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42킬로니까 약 100여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서 배나니 사는 나사로가 병드니까 사환을 보냅니다. 그래서 동 베나니 예수님에게 까지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시간은 하루가 걸리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한 참 바쁘신데 이틀을 그곳에 머무시니까 예수님이 동 베다니에서 서 베다니까지 오시는데 1일이고, 총 나흘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는 사환이 아프다는 소식을 가지고 간 직후 죽었고 두 가지 사건이 함께 일어나고 매장되었습니다.

유대나라는 가난한 사람은 당일 매장됩니다.

그 이유는 일기 가 덥고 그래서 햇빛에 놓으면 몰라도 안에 놓으면 당일 그냥 상합니다. 그래서 당일 매장입니다. 특별히 돈을 들여서 썩지 않도록 하고 40일 장도 하는 부자 있으나 당일 장은 평민들의 장례기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니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것은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불가능합니다.

 

첫째, 기후적인 면에서, 기후적 상황에서 시체가 썩습니다.

부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생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팔레스틴 지방은 바깥에서 죽으면 시체가 썩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원 전 미이라 아니고 생시체이고 6000년 된 시체인데 썩지 않습니다.

성경 사사기를 보면 사자를 찢어 죽였는데 시체에 벌이 꿀을 실어놓습니다. 광야에는 높은 데가 없으니까 사자 시체가 높으니까(바닥은 모래이고 흙이니까) 햇빛에 말라서 나무 토마처럼 되어 버립니다. 벌이 거기다가 꿀을 실어놓습니다. 이것은 역사성에 전혀 위배됨이 없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유대나라는 시체를 집안에 두니까 썩기 좋으니 그 날 바로 매장해야 하고 굴에도 습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굴에서도 썩는다.

두 가지 점에서 불가능합니다. 기후적 상황으로 불가능하고, 민간 설화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유대나라는 미신을 많이 믿습니다. 죽으면 영혼이 시체 곁에서 삼 일간 머물다가 떠난다는 민간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게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삼일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것 설교시간에 지적)

잘못된 것이지만 미신을 생각해서도 불가능합니다. 미신적인 관점에서도 불가능합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가능성이 종결되었습니다. 나흘 되었다는 것은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니까 베나디가 예루살렘에서 5리 쯤 된다고 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가깝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누가 많이 왔다? 유대인이 문안을 많이 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 사건은 첫째로 예수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기초 사건으로 예비되었습니다. 요것을 보여줍니다. 훗날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고,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도록 하시기 위한 준비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오시지 않고 이틀 머무신 것은 치료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회생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입니까?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며, 부활을 믿도록 준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할 점은 나사로에게는 부활이라는 것을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나사로는 부활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부활이 아니라 예표적 사건이고 나사로의 회생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체는 시공을 초월합니다. 나사로는 시공초월 못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돌문 닫힌 상태로 부활하여 나오셨습니다.

나중에 돌문을 연 것은 예수님이 거기에 없으시다는 증거로 돌문을 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 돌문을 여신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돌문을 열어서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부활 후 예수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나사로는 회생하여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는 나사로에게는 부활이라는 용어를 성경에는 절대 쓰지 않습니다. 성화에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제목은 잘못 사용되어 진 것입니다. 나사로 회생 그래야 합니다.

성경에는 부활체 두 곳에서만 사용됩니다. 성경에 예수님 부활을 말하고 고린전서 15장 성도가 나중에 부활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부분에서 불신앙으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게 됩니다. 20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집에 있고 마르다만 나오기 때문에 마리아가 삐져서 안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상주로서 손님을 접대해야 되기 때문에 교대로 예수님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게 답입니다.

마르다가 하는 말이 마르다의 신앙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1)

마르다가 주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 이다.” 이 말에서 마르다가 얼마나 주님을 기다렸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기다림의 아픔, 한을 고백- 교인들 눈물을 흘리게 연출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여기서 예수님을 먼저 기다린 상황을, 기다린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다의 불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가지의 불신앙)

첫째는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 전이나 치료가 가능하다는 불신앙

둘째는 예수님이 멀리 계셔서 치료할 수 없었다는 불신앙

셋째는 이제 죽었으니 무슨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차는 떠나가 버렸다는 나약한 불신앙

여기 계셨다면 죽지 아니 하였겠나? 이다. 죽었으니 차는 떠나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지 전에 오셨어야지…….

 

여기서 예수님의 치료 능력은 믿지만 회생 능력은 믿지 못하는 마르다의 나약한 신앙 곧 불신앙을 발견케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도 이런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능력도 가까이 있어야지 나타나는 것이지 멀리 있으면 효력이 없다는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저급한 신앙, 나약한 신앙으로 인하여 이때에 섭섭해 하십니다. 가장 믿어야 할 자가, 가장 의지해야 할 자가, 가장 예수님을 필요한 자가 믿지 못할 때 예수님은 섭섭해 하십니다.(이것 강조 설명) 이것이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원인,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인정적인 신앙에 불과하고 오셨으니 체면이나 세워드리자는 인사치례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이런 나약한 신앙이 어디서 오는가?

22절을 보면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고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

우리는 아나이다.”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 신앙이 아니고 믿나이다.” 신앙이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아나이다.” 신앙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도 무슨 신앙입니까? 이성적인 신앙에 불과했습니다. 이론적 신앙, “아나이다.” 신앙이었습니다. “믿나이다.”의 신앙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알지 못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는 신앙보다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지식에 머무는 신앙보다는 그것을 믿어서 받아드리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의 신앙이 한 단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지식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 강조)

 

이성적인 신앙, 지식적 신앙 이것은 믿음의 충족한 내용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플러스해서 경험적이고 감성적이고 감흥적인 것으로 들어갈 때 완전한 신앙으로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지식적 신앙 아무런 위로를 주지도 받지도 못합니다. 지식적인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23절에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장례식에서 인사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 인고 하면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 이게 바리새인들의 장례인사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어떤 면에서 좋은 신앙입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르다는 조문인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먼저 아나이다하고 또 아나이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큰 위로는 나도 죽는 다.” 제일 큰 위로의 말씀입니다. 부활의 때에 다시 사는 말이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울지 마! 소용이 없는 말입니다. 나도 죽는다. 너도 죽는다. 그러나 다시 부활한다. 그 두 가지 밖에 위로가 되는 것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위로사로 마르다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리새인들의 조문사와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나이다 마지막 살아날 줄 .... 이것도 이론적으로 살아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가로되 예수님의 말씀도 바리새인들의 조문사로 동일하게 이해하고 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신앙은 교리적인 신앙입니다.

예수님 말씀과 비교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은 현재를 이야기 합니다. 마르다는 미래에 살아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마르다는 교리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조문객의 위로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25-26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노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사랑의 그리고 강압적인 신앙의 권면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과 같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너 살아야 되리라 사랑이 넘치고 신앙적이고 강압적인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믿나이다.”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이제야 믿나이다.”의 신앙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신앙, 미래 지향적인 신앙은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어려움을 타개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 얼마나 현실에 어려움이 많습니까? 현실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타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믿나이다.” 신앙을 회복해야 되겠고 지성적인 신앙이 아니라 경험적인 신앙, 감성적인 신앙을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강권적인 신앙의 권면을 받아 드려야겠습니다. (강권적 신앙 수납을 강조해야 합니다.)

가장 필요로 한 자가, 가장 믿어야 할 자가 해결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래 지향적인 신앙(나중에 된다는 신앙)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타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대지 요약 - 이렇게 신앙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희미하게 믿기 때문에 예수님은 섭섭하심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어주지 못할 때, 예수님은 만족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예수님의 만족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충실한 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눈물은

2. 인생의 비애 때문에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인생의 비애는 우리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인생의 비애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질고를 알고 계신다고 했고, 우리 슬픔을 가장 아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이 슬픕니다. 그로 인해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

예수님이 왜 우시겠습니까? 그냥 서러워서 울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눈물의 의미가 있기 않겠습니까?

32절에 마리아가 예수께서 계시는 곳에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르다 하고 다른 것이 무엇 인고 하면 발 앞에 엎드려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맞이하는 장면... 발 앞에 엎드려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발 앞에 여인이라주석들에 나옵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언제 발 앞에 엎드렸느냐?

누가복음 1039절에 보면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더라.”

요한복음 123 절에 보면 예수님 발 앞에서 기름을 부었고…….”

본 절에서는 발 앞에 엎드려 울었다.” 그래서 발 앞에 여인이라는 별명을 갖게 됩니다.

 

자매가 똑같은 말을 합니다. “여기 계셨다면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자매가 똑같이 기다리고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3절에 예수님께서 그의 우는 것과.. ” 그는 마리아입니다. “또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도 통분히(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이 우는 것은 어디를 보느냐? 눈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는 모습을 통해 심령을 봅니다. 마리아의 심령을 예수님이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비통하게 여기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실 우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이 와서 웁니다. 그 때 그들의 심령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심령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으냐? 자랑하고 서로 싸웠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세족식을 하셨습니다.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발을 닦아 주신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해괴한 것이 12명밖에 안 됩니다. 그 가운데서 일등 되어봐야 면장만도 못합니다. 정말 12명 중에서 높이 되어봐야 별 볼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높이 되어봐야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 광경을 보시고 예수님이 얼마나 그들이 철이 없고 한심했겠느냐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 운명을 다 아십니다. 어떻게 언제 죽을지 다 압니다. 제자들이 다 순교할 것 다 아십니다. 예수님이 다 주관하시는 것이니까 …….

얼마나 예수님 보시기에 한심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발을 닦아 주시면서 겸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화)

옛날 닭 잡아주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닭장 안에서 꼬꼬댁하면서 닭들이 서로 싸웁니다. 이유도 없이 사웁니다. 밥그릇 때문에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한 마리는 죽어가고 있는데 ...이 놈도 조금 있으면 죽을 운명입니다. 깃을 세우고 싸우고 있습니다. 누가 찍어버리기만 하면 죽을 것인데... 웃기는 장면입니다. 우리 목사들 모습 아닙니까?

 

예수님은 심령을 보십니다. 속에 있는 맘을 보십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눈으로 나를 보신다. 여러분들이 원통하고 어려울 때,

원통하고 어려울 때 부모에게 말한다고 해서 부모가 이해 못합니다. 나의 원통함과 이 한을 부모가 다 이해 못합니다.

형제가, 교인들이 다 이해 못합니다.

그 원통함으로 눈물이 내 눈에서 나옵니다. 내 눈은 나를 가장 불쌍하게 보는 것입니다.

형제의 눈도 나를 그마 만큼 불쌍히 여기지 않는데 부모가 나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눈이 나를 불쌍하게 봅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도 나를 액면 그대로 못 봅니다. 몸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내 눈으로 나를 감찰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이 기록내용을 고쳐 버렸습니다.

어떻게 고쳤는가 하면 하나님이 내 눈으로 나를 감찰한다.”고 하지 않고 “....... ”

나를 가장 불쌍히 보는 내 눈 .... 그 눈으로 나를 감찰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눈물 흘릴 때, 주님도 눈물 흘리는 만큼 나를 불쌍하게 보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눈으로 그 눈이 나를 보시는 것입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만큼

예수님의 비통함은 죽음에 대한 비통함.

예수님은 하나님의 조문 사절단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비통으로 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관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보시느냐 그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슬픔에 완전히 동조하시는 예수님의 눈물이 엇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메시야이신 주님이 인간의 죽음을 인간의 비통함으로 알게 됩니다.

인간의 죽음을 슬픔으로 정의하십니다.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을 해결주신 것입니다.

 

이 눈물은 유대인의 눈물과 다릅니다.

풍한의 눈물

인간의 눈물은 통한의 눈물

무능력의 눈물

어쩔 수 없는 눈물 …….한 숨의 눈물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능력의 눈물입니다.

죽음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어쩔 수 없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서 흘리는 인간의 통한의 눈물이 아니라

얼마나 너희들 슬프냐? 위로 해주시는 눈물이고 사랑의 눈물입니다.
참 인간이 비통합니다. 너희들 슬프지 …….그 눈물을 내가 닦아 주마 하시는 위로의 눈물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몇 번 울 으셨습니까? 예수님은 3 번 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눈물입니다. 예루살렘 바라보면서 소리 내어 우셨습니다. 국가적인 눈물로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면서 흘리신 눈물입니다. 개인적인 눈물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은 한 번도 웃으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웃으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 질 것을 늘 생각하십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은 현실로 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일이므로 웃음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인간의 죄성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웃음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제자들의 운명을 다 알고 계십니다. 웃음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옭으셨다는 말은 있어도 웃으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화가운데 예수님이 너털웃음을 웃는 모습이 있는데 그게 기뻐하셨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오케이인데 성도들에게 오해를 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렇게 웃었구나 한 마디도 없습니다.

웃음은 철없는 인생들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철없고 그래서 그렇지 솔직히 몇 살에 죽을지 모르지만 죽을 때 비통하게 죽을 그 모습 생각하면 웃음 나오겠습니까? 안 나옵니다.

예수님이 속 더러운 맘을 다 알고 계시는데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웃음이란 우리가 농담 따 먹는 것은 철없는 인간들의 유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인간 존재니까 그렇게 웃으면서 살아야겠지요? 이것을 부인하고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까지 높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웃으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처럼 권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언젠가 풀처럼 시들어갈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둘로 나눠집니다. 지금은 오늘 본문에 자리는 비하(卑下)의 자리입니다. 어디까지 卑下인가 하면 장례지낼 때까지 卑下입니다. 卑下期에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卑下가 나오고 承句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비하기에는 어디까지나 비통하게 지내셨고 진지하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울으셨고 여기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37절에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 죽지 않게 할 수 없더냐?” 사실 이들의 말도 이해가 갑니다. 이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게 하지 않게 하지 이제 눈물만 흘리느냐 라고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눈물 자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물은 필요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인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눈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 사건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고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 그 때 마르다가 말합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니 썩어 냄새가 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미 죽어서 썩었습니다. 그러므로 돌문을 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끝나서 썩었습니다. 나사로는 이제는 회생 할 소망이 없습니다. 그걸 이야기 합니다.

40절에 예수님이 내 말을 믿으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그 때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기도를 하시고(43)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동인채로 나오니라.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라. 다니게 하라.”

여기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썩은 자도 살아나서 회생케 되는 능력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바로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비애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지만 그 비애를 해결하시기 위한 눈물도 됩니다.(눈물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이 좋다)

한 가지 무덤에서 나사로가 나오기 위해서는 나사로가 살아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미 나사로는 예수님 말씀 듣기 전에 이미 살았습니다. 그래야 예수님 말씀 듣고 순종하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미 살려 놓으셨습니다.(이것이 중요)

나사로야 나오라 이 명령을 들으려면 살아나 있다가 나오라는 명령으로 나와야 합니다.

나사로는 이미 살아나서 그 말씀에 순종하고 나오라는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나사로는 이미 살아있어야 됩니다.(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강조)

이 명령은 살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나오라는 명령입니다.

나오라는 명령에 살으라는 명령까지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나오라는 명령은 그 냥 나오라는 명령입니다.

살으라는 것은 예수님이 미리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꼭 말로서 해야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만져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있어야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있어도 보이지 않아도 말을 아니 하셔도 예수님은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이것 강조)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섭리입니다. “너는 가서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서 입에서 한 세겔을 꺼내라.” 그것은 바로 무엇입니까? “동전 하나를 네가 얻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그렇게 되리라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예언이 아니고 작정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선포입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왜 늦게 오셨느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오셨는가? 나사로가 미워서 아닙니다. 누이들을 애태우려고 아닙니다.

이유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심이 아니고 죽은 자, 썩은 자 살리기 위하심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이 이틀을 머무신 이유입니다. 더더욱 썩은 자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가 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가도 해결할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때 기도가 서서히 응답된다 해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 그 능력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비애를 주님이 눈물로 화답하셨습니다.

내 눈가지고 나를 보시는 주님을 오늘 본문은 강조해주시고 있습니다.

11절을 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깨우러 가자.”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동 베다니에서 출발하시면서 이 언어를 쓰십니다. 나사로에게 친구라는 단어를 쓰십니다.

이 내용을 설명하므로 이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왜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라고 했습니까? 사랑하는 자이기에 친구입니다. 어렵고 외롭고 슬픈 자이기 때문이기에 친구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를 친구로 생각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어렵습니까? 주님께서 친구로 여러분들을 보십니다. 이 친구를 여러분들 의지하고 믿으시고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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